교회소개

고등부

“매주 고등부 예배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교회 공동체”
예배시간 주일 오전 11시
장소 2층 고등부실(208호)
담당교역자 최인성 목사

말씀 앞에 묻다

질문
답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경을 많이 읽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가며 하나님에 대해 궁금한 내용들을 ‘말씀 앞에 묻다’를 통해 더 구체적으로 질문해 보세요.
신학교에서 만났답니다. 공부만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기도도 열심히 하는 모습이 좋아서 제가 꼬셨습니다.
하나님은 본성상 죄를 지을 수 없는 분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본성과 완전히 반대되는 개념이에요. 다만 이 질문이 예수님에 대한 것이라면 답변은 조금 달라집니다. 예수님을 고려하여 질문한 것이라면 추가적으로 구체적인 질문을 부탁드려요.
적어도 제 기억 안에서는 한 번도 없습니다. 가족여행으로 놀러갔을 때도 근처 가까운 지교회를 방문하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헌금을 깜박한 적은 있을 것 같은데 의도적으로 그런 적은 없는 것 같아요.
하나님이 질투하신다는 표현은 신인동형동성론적 표현입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질투의 감정을 하나님이 질투하신다는 표현에 완전히 일치시키는 것은 오류입니다. 다만 성경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방식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계시하기 때문에 이런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가령, 하나님은 영이신데 성경에는 실제로 하나님의 ‘오른손’ 같은 표현들이 등장하죠. 우리는 이런 표현들을 만날 때 실제로 하나님이 오른손을 가지신 분이구나 하고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이런 표현은 당연히 문맥을 따라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이해해야 옳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도 언약에 기초하여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독점적인 사랑(이와 관련하여 십계명 중 제1계명을 참고하세요)에 대한 표현으로 이해해야 하지, 하나님께서 무언가 부족하거나 결핍의 상태나 감정으로 우리를 향해 인간과 같은 질투심을 가지신다고 이해하는 것은 매우 큰 오해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에 관해서는 제가 고등부 설교에서 추후 구체적으로 다룰 생각입니다. 질문과 관련해서 페일스의 ‘누가 여호와와 같은가’ 일독을 추천합니다.
저는 성경을 읽거나 기도를 하는 일을 가리켜 ‘경건의 습관’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성경읽기나 기도는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항상 반복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과 장소, 분량을 정해두고 성경을 읽는 것이 좋습니다. 이때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방법은 성경읽기표를 사용하는 겁니다. 요즘은 성경어플에서 성경읽기표를 분량에 맞게 설정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읽기표에 체크를 하면서 성경을 읽으면 실제로 미션을 수행하는 기분이 듭니다. (이걸 혼자하지 않고 가족들이나 친구들과 함께한다면 효과가 더 좋습니다) 그래서 매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어떻게든 성경을 읽게 되죠. 물론, 매일 성경을 꾸준히 읽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낙심하지 말고 성경읽기를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읽기표를 통해 성경읽기의 분량을 정했다면 시간과 장소를 정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 매일 아침 8:30-9:00까지 성경읽기를 한다고 정하면 그 시간에 항상 같은 장소에서 성경을 읽는 겁니다. 만약 오늘 읽을 분량을 다 채우지 못했다고 해도 성경읽기 시간이 기준이 된다면 경건의 습관을 훈련할 수 있게 됩니다. 정말 피곤하고 도저히 그럴 수 없다고 한다면 성경어플에 푸쉬알림 기능을 활용해 보세요. 내가 정한 시간에 오늘의 말씀이 휴대폰 알림으로 뜨게 됩니다. 그것이 바람직한 방법은 아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성경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사실 질문하신 것처럼 ‘피곤해’, ‘바빠’ 등은 핑계거리에 불과합니다. 내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우선순위가 그분께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일을 가볍게 여기거나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물리적으로 읽는 행위 자체가 어렵다면 등하교를 하거나 출퇴근 할 때 이어폰을 통해 성경을 들으며 묵상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부정한 나병환자에게 직접 손을 대셔서 깨끗하게 하십니다. 어떤 면에서 주님은 더러운 죄인을 거룩하게 만드시고 깨끗하게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흔히 ‘구원’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신이 단지 육체적인 필요(오병이어의 이적으로 대표되듯이 양식의 필요나 질병의 치유와 같은 것들)만을 위해 오신 메시아로 오해되는 것을 피하고자 하셨습니다. 또한 우리는 나병환자를 고치신 사건을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쳐주시니 참 감사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 종교적인 상황에서 주님께서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시고 그를 치유하신 사건은 대단히 위험한 행동입니다. 본래 나병환자는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금해야 하는 부정한 상태이기 때문이죠. 그런 사람에게 직접 손을 댄다면 본래 손을 댄 그 사람도 부정하게 된다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물론,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부정하게 되셨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깨끗하게 하셨기 때문이죠). 나병환자를 고치신 후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기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주님께 바란 것은 주님의 목적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쉬운 말로 하면, 그들은 단순히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것뿐이지 그분이 누구신지 알고, 그분이 행하시고 행하실 일을 믿고 따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잘 읽어보면, 주님은 그럴 때마다(사람들이 구원의 역사를 이루려는 주님의 일과 상충될 때마다) 자리를 피하셔서 홀로 떠나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질문하신 것에 대해 이렇게 답변할 수 있을 것인데, 1. 주님께서 나병환자의 입을 통해 (나병환자가 이해하는 대로)알려지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은 사람의 질병을 고치려고 이 땅에 오신 의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물론, 환자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을 고쳐주시지만 주님은 메시아이자 구원자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죽음이 죄의 삯이라고 말합니다(롬6:23). 따라서 모든 사람은 자기 죄에 대한 댓가로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까닭은 어떤 면에서는 당연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본래부터 (사람의 창조 때부터) 주어진 자연스러운 본성이 아니기 때문이죠. 인류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죽음을 너무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신자의 죽음 이후에 치러야 할 형벌을 대신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신자는 죽음 이후에 곧바로 주님이 계신 ‘하늘’(천국)로 가게 됩니다. 따라서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에 우리에게 평안함을 주시고 영생의 소망을 불어넣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스스로 이르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참된 진리입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15장이 증언하는 것처럼 우리도 죽음 이후에 때가 되면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입니다. 그러니 죽음을 준비하며 사는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그때에 성령 하나님께서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게 하시며 온전한 평온함 가운데 우리를 기다리시는 생명의 주님을 믿고 바라볼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문턱에서 우리를 환한 미소와 따뜻한 품으로 맞아주실 것입니다.
천국에 가거나 지옥에 가는 것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 안에서 죄와 싸우고자 하는 의지가 발동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개인적인 죽음에 이르기까지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이 말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을 참되게 믿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또한 의지적으로 죄와 싸우려고 한다는 뜻입니다). 신자 안에는 실재로 부패한 본성으로 말미암아 내재하는 죄가 남아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성경은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대립으로 표현합니다(갈5:17). 동성애는 분명한 죄입니다. 성경은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죄에 해당한다고 말씀합니다(고전6:9-10). 그러므로 동성애를 지속하면서 천국에 간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기만입니다. 그러나 동성애를 그만두고 예수님을 의지하며 죄를 회개하는 사람에게 천국은 활짝 열려있습니다. 동성애적 끌림은 명백한 죄의 경향입니다. 그런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밝힐 필요는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 분명하게 끊어내고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동성애를 끊어버리고 예수님을 의지하여 죄와 싸워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주의 성령께서 거룩한 마음과 더러움에서 구별된 깨끗한 생활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고전6:11). 그리고 예수님께서 자기를 믿는 신자의 모든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기억하고 ‘나를 죄로부터 건져달라고’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향한 참된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
질문자의 진지한 고민이 느껴지는 좋은 질문입니다. 그러나 주신 질문에는 몇 가지 오해와 교정해야 할 개념들이 존재합니다. 사실, 질문의 전제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우선, 종교개혁의 전통을 따르는 우리 개혁파 교회는 칼빈의 ‘예정론’을 긍정합니다(몇 가지 이유에서 구원예정설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의 예정을 가르칩니다(엡1:4-5). 2.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선택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3. 하나님은 전능하실 뿐만 아니라 전지하십니다(하나님이 모를 수도 있는 가능성의 현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4.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질문자께서는 ‘자유의지’에 대한 개념과 ‘선’의 개념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전지하심 덕분에 인간은 온전히 자유롭습니다. 위 내용은 어려우면서도 매우 은혜로운 성경의 보화들입니다. 먼저 1-2번 내용에 관해서 말씀드리면, 여기서 중요한 전제는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인간의 구원에 대해 말씀하는 중요한 대전제입니다(롬3:23).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정은 영원히 심판 받아야 하는 죄인에 대한 은혜로운 선택입니다. 이 사실이 어찌 하나님이 선하지 않다는 근거가 될 수 있습니까? 만약 우리가 죄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부인하게 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적어도 정의로운 하나님은 아니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는데, “지옥에 가는 사람은 자기 죄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예정과 관련하여 구원을 받을 사람(천국에 갈 사람)과 심판을 받을 사람(지옥에 갈 사람)에 대한 선택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이것을 구원의 필연성이라고 부르지 않고 구원의 ‘불변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좋습니다. 3-4번 내용과 관련하여 다음의 사실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우리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롭습니다. 가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는 사실 자유선택이라고 불려야 정당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지’는 ‘언제나’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부패한 본성의 자유가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어떤 중간지대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가령, 질문자께서 주신 질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롭지 않다’는 뉘앙스가 느껴집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기 때문에(예지하시기 때문에) 온전히 자유롭습니다.’ 이 사실이 조금 어렵게 느껴지겠지만 분명한 사실입니다. 가령, 우리는 자유롭게 선과 악을 취사 선택할 수 있는 어떤 중간지대에 놓여있지 않습니다(이와 관련하여 루터의 ‘노예의지론’ 일독을 권합니다). 한 번 질문자의 현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죄를 짓고 싶지 않다고 해서 죄를 안 짓게 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분명히 죄이고 해서난 안 되는 나쁜 짓인 걸 알면서도 항상 죄를 짓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의 본성이 부패하고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의 노예 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우 자유롭지만 언제나 선과 악 중에 (자유롭게)악을 선택합니다. 이 선택은 강요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 초대교회의 교부인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유의지론’을 참고하는 것이 좋습니다. 본서의 해제에서는 아래와 같이 말합니다. 필연과 의지의 공존을 사고하는 논지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 안에 있는 것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이루어지는 무엇이 아니라 시간이 없이 영원하다. 따라서 하나님 안에서는 원함과 필연이 상반될 수가 없다. 그분이 설정하신 우주의 질서는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 한번 정해두셨을 뿐이다. 새로운 의지로 무엇을 조종하시는 일은 결코 없다. 그러나 인간 조건에 적용하면 원의와 필연은 상반되어 보인다. 그렇지만 “우리는 의지로 원하는(의지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은 모순된 언표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 의지가 행할 바를 하나님이 예지하시기는 하지만 그것 때문에 우리가 의지로 무엇을 원하는(의지하는) 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고 단언하면서 하나님의 예지 속에서도 인간측의 “원하는 자유”libertas volendi는 항상 보전된다고 역설한다. 따라서 “나는 필히 그렇게 원할 수밖에 없다”necesse est ut ita velim는 명제는 모순이다.하나님의 우리 의지를 예지하신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자유의지로 예지하시므로 그의 예지가 원하거나 원치 않는 의지를 박탈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예지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확보한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단정이다: “하나님이 예지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원하고 원치 않는 우리 능력이 감소되는 것은 아니다. 그 예지가 틀림이 없는 그분이 장차 나의 능력이 존재하리라고 예지하셨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나의 능력이 내게 더 확실하게 엄존하게 된다.” 하나님의 예정에 대해 종교개혁자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도가 전하는 말씀에 따라서 우리는 신자들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선택의 의지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과, 이러한 호의가 행위에 의해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값없이 부르심으로부터 도래한다는 사실을 견지한다……그러므로 야곱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선택되었으며, 배척당한 에서와 구별된 것이었다. 공로에 있어서는 서로 간에 다른 점이 없다. 만약 당신이 그 원인을 묻는다면 사도의 대답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이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롬9:15).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묻고자 한다. 이에 대한 더할 나위 없이 명확한 답을 여호와가 친히 주셨으니, 그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실 때 그들 자신 가운데서 그 어떤 이유도 찾지 않으시고 오직 자기 자신의 자비에서만 그 이유를 취하시므로(롬9:16) 그들 자신에 대한 구원은 그 자신의 일이다. 더불어 칼빈은 아래와 같이 말하는데, 이 응답이 오늘 질문하신 분께도 영혼의 위로이자 하나님은 언제나 사랑이시며 공의이시고 절대선이시라는 데 실천적인 도움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구원을 오직 그 자신 속에서 수립하셨는데 왜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로 침잠하는가? 그가 오직 그 자신의 자비로써 당신을 지명하시는데 왜 당신의 공로에 의존하려고 드는가? 그는 당신의 생각을 오직 그 자신의 자비 속에 제한시키시는데, 왜 당신은 일부나마 당신 자신의 행위에 관심을 기울이는가? 이렇게 우리는 성경과 바른 신학적 전통 위에 근거하여 사고할 때 하나님의 예정이 단순히 불합리하고 불의한 결과의 원인이 아니라 그 아들을 죄인을 위해 내어주신 은혜의 결과임을 깨닫고 주를 찬미하게 될 것입니다. 칼빈은 이어서 말합니다. 누가가, 그리스도는 “하나님꼐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죽음에 “내준 바 되었거늘”(행2:23)이라는 베드로의 선포를 전할 때, 그 하나님은 그저 관망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구원의 조성자이심이 분명하다.
가능하면 요가 대신 필라테스나 다른 운동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요가는 이주민이었던 인도-아리안들의 다르마를 향한 끄시마와 요가의 반복된 행동 패턴에서 유래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가는 처음부터 기독교 세계관의 관점에 부합하지 않고, 현대의 요가 또한 정신수양적 차원에서 결코 건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튜브에서 플라톤아카데미 강성용 교수의 인도 이야기 강의 시청을 권합니다.
신앙과 믿음을 동의어로 이해하여 답변드립니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믿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견고하고 확실한 지식이다. 이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저 주신 약속의 진리에 기초하는 것으로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에 계시되고 우리의 심장에 새겨진다.” 따라서 믿음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칼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하나님의 말씀에 규정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라고 여긴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참된 믿음에 관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 아래와 같이 고백하고 가르쳤습니다. 21문. 참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답. 참된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모든 것을 진리로 여기는 확실한 지식인 동시에, 하나님께서 값없이 은혜로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죄 사함과 영원한 의와 구원을 다른 이들에게만이 아니라 나에게도 베풀어 주셨다는 견고한 신뢰로서, 성령께서 복음을 통하여 나의 마음 속에서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히브리서 11장을 참고하여 묵상하시면 좋겠습니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방산업체에 취업하거나 방산기술을 개발하는 일을 한다고 해서 6계명을 범하는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칼과 방패 중에서 우리는 가능한 방패를 만드는 일을 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러나 현대전에서 칼은 곧 방패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때때로 압도적인 힘은 전쟁을 억제하는 기능을 하기도 하죠. 따라서 침략전쟁을 목적으로한 기술개발이 아니라 정당한 방어전쟁을 위한 기술개발은 합당하고 또 필요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반은총의 빛 아래에서 우리에게 여러 직업들을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생각하고 있는 분야에 대해 성경적인 세계관 및 가치관에 근거하여 전문성을 가진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훌륭한 일을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항상 강조하는 것입니다만 천국에 가고 못 가고는 행위에 달려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는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타투를 몸에 하거나 하지 않거나는 개인적인 가치관, 또는 사회적인 인식에 달려있지 구원과 관련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의 덕을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이 더 좋은지 성경에 기초하여 충분히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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